일명 ‘승사록(乘槎錄)’·‘강해산인승사록(江海散人乘槎錄)’이라고도 한다.
1917년 최두찬의 증손 최지영(崔址永)이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책머리에는 1917년 서정옥(徐廷玉)이 쓴 서문과 1918년 중국인 심기잠(沈起潛)이 쓴 서문·목록을 싣고 있다. 책 끝에는 최지영의 발문이 있다.
2권 1책. 한문목판본. 이본으로 규장각 도서에 필사자와 필사연대를 알 수 없는 필사본 1권 1책이 전한다.
권1에는 시문이 실려 있다. 시는 저자가 제주도에서 지은 「제주록(濟州錄)」과 표류 중에 짓거나 표착 직후에 지은 자작시 및 중국인들과 창수(唱酬)한 작품을 모은 「정해록(定海錄)」·「절강록(浙江錄)」·「산동록(山東錄)」·「연경록(燕京錄)」 등으로 되어 있다. 문은 「주중고천문(舟中告天文)」 등의 4편을 싣고 있다.
권2는 일기(日記)와 추록(追錄)과 부록(附錄)으로 되어 있다. 일기는 1818년 4월 8일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저자가 제주(濟州)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 나주(羅州)로 오다가 표류하여 중국의 북경(北京)을 거쳐 귀국하기까지의 표해 기록이다.
최두찬은 남녀 50여 인과 함께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닿았다. 최두찬은 뛰어난 글재주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북경(北京)을 거쳐 10월 2일에 요동의 책문(柵門)에 이르렀다. 『강해승사록』은 그 때까지의 노정과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추록에는 저자의 견문 중에서 중국의 풍속 문물에 관하여 실려(室廬)·의복·가색(稼穡)·분묘(墳墓)·주거(舟車) 등으로 나누어 설(說)한 것과 「임별증양지회설(臨別贈梁知會說)」 및 중국인 허롱(許礱)이 쓴 「근서승사록후(謹書乘槎錄後)」가 수록되어 있다. 부록은 저자의 증손인 최지영이 지은 「유사(遺事)」와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를 묶은 것이다.
규장각 도서인 필사본의 책머리에는 「자인부설소(慈仁復設疏)」와 전라감사 김경선(金景善)의 아들 한림(翰林) 김익문(金益文)이 영리(營吏)의 아내를 꾀어 서울로 데려가려 하였다가 그 남편이 탄원서를 올려서 아내를 되찾았다는 제목이 없는 이야기가 있다.
이어서 「경상도창원관노실여자원정(慶尙道昌原官奴失女子寃情)」·「함경도사인승씨부인원정(咸鏡道士人承氏婦人寃情)」 등의 글이 실려 있고, 그 뒤에 최두찬의 표류일기만을 싣고 있다. 최두찬의 표해기 이외의 기록들은 모두 최두찬과는 무관한 일이므로 필사자가 자기 마음대로 옮겨 실어서 최두찬의 표류기와 한 책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