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 중국군 헌병사령부 소교영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27년 8월 임시정부 요인 여운형(呂運亨)의 주선으로 황푸[黃埔]군관학교에 입학, 졸업한 뒤 중국군에 입대, 복무하였다. 그리고 동기동창인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때 동기생 권준(權晙) 등 6명과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난징헌병사령부에 소속되어 독립운동자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1931년 이후 난징동사령부에 재직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특별 당원으로 입당한 뒤, 일본 첩자들이 수집한 정보를 탐지하여 당 고위층에 전달하여, 대책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활동에 장애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데 기여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중국관내 각 혁명단체를 통합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 뒤 5당이 통합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할 때 참여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난징장정총대기요간부(南京壯丁總隊機要幹部)로 재직하면서 신한독립당계(新韓獨立黨系) 50여 명이 뤄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난징 태산(泰山)여관에 숙식하며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당수 지청천(池靑天: 이청천)의 요청으로 50명의 청년을 장정명단에 편입시켜 생활필수품을 보급받아 유지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뒤 1년여 동안 매월 급여 80원 중 50원을 지원하였다.
1935년 5월 중국군 헌병사령부 상위(上尉)에 이어 1940년 12월 헌병제8단 소교단(少校團), 1942년 10월 동 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등으로 복무하면서 항일운동가의 신변보호와 재정지원에 헌신하였다.
특히 쑤저우에 주둔한 일본군내 한적(韓籍) 사병 정희섭(鄭熙燮)·성동준(成東濬)·김수남(金壽男) 등 수십 명을 집단 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킨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1942∼1945년까지 강서·호북·호남 등지에서 헌병영장 재임 시 포로관리 및 한적사병 분리수용과 보호임무를 수행하면서 한적 사병을 광복군으로 전출, 편입시킴과 동시에 징모처(徵募處)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참모로 전임되어 교포의 안전귀국을 지원하였으며, 광복회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한국광복군』(이현희, 독립기념관, 1991)
- 『임정과 이동녕연구』(이현희, 일조각, 1990)
- 『중경임정과 광복군연구』(이현희, 일조각, 1990)
- 『독립유공자공훈록』5(국가보훈처, 1988)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 『독립운동사』4·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75)
- 『한국독립운동사』5(국사편찬위원회, 1969)
- 『한국독립사』하(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 『學經歷證明書』(中華民國國防部發行, 1964)
- 『明治百年史叢書』2(金正明,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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