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기진(基鎭). 경기도 고양 출신. 중국 상하이[上海]·난징[南京]·쑤저우[蘇州]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2월 의열단원 오세덕(吳世德)의 권유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던 한국청년동맹회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8월 임시정부 요인 여운형(呂運亨)의 주선으로 황푸[黃埔]군관학교에 입학, 졸업한 뒤 중국군에 입대, 복무하였다. 그리고 동기동창인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때 동기생 권준(權晙) 등 6명과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난징헌병사령부에 소속되어 독립운동자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1931년 이후 난징동사령부에 재직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특별 당원으로 입당한 뒤, 일본 첩자들이 수집한 정보를 탐지하여 당 고위층에 전달하여, 대책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활동에 장애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데 기여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중국관내 각 혁명단체를 통합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 뒤 5당이 통합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할 때 참여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난징장정총대기요간부(南京壯丁總隊機要幹部)로 재직하면서 신한독립당계(新韓獨立黨系) 50여 명이 뤄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난징 태산(泰山)여관에 숙식하며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당수 지청천(池靑天: 이청천)의 요청으로 50명의 청년을 장정명단에 편입시켜 생활필수품을 보급받아 유지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뒤 1년여 동안 매월 급여 80원 중 50원을 지원하였다.
1935년 5월 중국군 헌병사령부 상위(上尉)에 이어 1940년 12월 헌병제8단 소교단(少校團), 1942년 10월 동 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등으로 복무하면서 항일운동가의 신변보호와 재정지원에 헌신하였다.
특히 쑤저우에 주둔한 일본군내 한적(韓籍) 사병 정희섭(鄭熙燮)·성동준(成東濬)·김수남(金壽男) 등 수십 명을 집단 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킨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1942∼1945년까지 강서·호북·호남 등지에서 헌병영장 재임 시 포로관리 및 한적사병 분리수용과 보호임무를 수행하면서 한적 사병을 광복군으로 전출, 편입시킴과 동시에 징모처(徵募處)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참모로 전임되어 교포의 안전귀국을 지원하였으며, 광복회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