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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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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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일을 맡은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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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일을 맡은 관서.
내용

평양 등 여러 토관아문(土官衙門)에 설치하였다. 토관은 고려 초기의 향직(鄕職)에서 유래했다. 고려 말에는 평양 · 영흥 · 제주도에만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 세종대에 크게 확장되어 평안도에는 평양 외에 영변 · 의주 · 강계에 설치되었다.

함길도는 1405년(태종 5) 조사의란(趙思義亂)을 계기로 영흥부가 영흥군 또는 화주목(和州牧)으로 강등됨에 따라 감찰사영과 토관이 함흥에 이설되었다. 세종 때는 육진을 개척하면서 경원 · 길주 · 부령 · 회령 · 경성 · 온성 · 종성 · 경흥에 차례로 토관을 신설했다.

이처럼 주로 양계에 토관이 설치된 것은 북방기지를 충실하게 하고 합리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이 밖에도 세조 때에 경주 · 전주 · 개성에도 설치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길주와 함께 혁파되었다. 토관아문에는 중앙 관아와 같이 동반 · 서반이 있고 많은 관사가 부설되었으나 관품은 정5품의 한직(限職)이었다.

전빈서는 동반관사에 속했다. 1406년(태종 6) 6월 ≪태종실록≫에 보이는 평양부 동반관서에는 보이지 않으나, 다음 해 9월에 영흥부 토관을 상정하면서 진설서(陳設署) · 대관서(大官署)를 합해 전빈서라 고치고 영(令) 1인, 승(丞) 1인, 주부(注簿) 1인, 직장(直長) 1인, 녹사(錄事) 1인을 두었다고 한 데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1434년(세종 16) 4월 세종 때의 기록에는 함흥부 · 평양부 토관관서의 전빈서에 대해 함흥부에 영 · 주부 · 직장이 있었고, 평양부에 장(長) · 승 · 주부 · 직장 · 녹사가 있었다고 하여 영흥부 때의 토관과는 조금 다르다.

1462년(세조 8) 7월 세조 때의 기록에는 전빈서의 직장(職掌)에 대해 “사객을 공궤(供饋 : 음식을 대접함)하는 여러 가지 일을 맡는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또한 평양부에 영 1인, 승 1인, 주부 1인, 직장 1인, 녹사 1인을, 함흥부에 영 1인, 주부 1인, 직장 1인, 녹사 1인을, 영변부 · 경성부에는 주부 1인, 직장 1인, 녹사 2인을, 의주 · 회령 · 경원에도 주부 1인, 직장 1인, 녹사 2인을 두었다고 했으나 온성 · 부령 · 강계에는 설치했다는 기록이 없다.

한편, 개성에도 전빈서를 설치한 기록이 있으나 평양이나 함흥보다 그 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영흥부(이시애의 난으로 함흥에서 다시 옮김.) · 평양부를 비롯해 모든 토관아문에서 전빈서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토관아문이 태종 · 세종 · 세조 때를 거치며 잡다한 관서와 통폐합되고 정리되다 ≪경국대전≫에 와서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각 속사(屬司 : 소속된 관서 또는 부서)의 명칭과 품질이 통일되었다. 이처럼 토관아문이 대폭 정비되는 과정에서 전빈서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초기의 토관(土官)」(이재룡, 『조선초기사회구조연구』 일조각,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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