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4년(충혜왕 5)에 좨주(祭酒)로서 왕의 스승이 되었고, 충목왕이 즉위한 해(1344) 6월에는 왕의 서연(書筵)에 참여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이때 좨주로서 과거를 관장하여 안보린(安保麟) 등 99명을 뽑았다.
충목왕이 8살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버지 충혜왕의 왕비이자 어머니였던 덕녕공주가 섭정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한 해 12월에 전숙몽(田淑蒙)이 우대언(右代言)으로 있었을 때, 덕녕공주(德寧公主)의 뜻을 거슬러서 동래(東萊)로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중랑장 김환(金煥)·경윤화(慶允和)와 제공(提控) 장안세(張安世) 등은 전숙몽이 비록 죄가 있지만 오랫동안 시강(侍講)을 하였으니 귀양 보낼 수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판서 이원룡(李元龍) 등 100여 명과 함께 왕에게 상소하여 소환을 청원했으나 왕이 듣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충목왕의 시학(侍學)이 되어 사부(師傅)라 불렸던 것으로 보아 곧바로 복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숙몽은 신예(辛裔)와 서로 연이어 권세를 부려 몇 달 사이에 친척과 친구들이 재상의 자리에 포열(布列)하였다.
충정왕 때에는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그때 규정(糾正) 신익지(申翼之)가 악소배(惡少輩)의 말을 몰수하여 사복시(司僕寺)로 돌렸지만, 전숙몽이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빼앗아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전숙몽의 열전(列傳)이 『고려사』 권125 간신전(姦臣傳)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