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산해(山海). 경상북도 울진 출신. 향리 서당에서 사서삼경에 통달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원산에 살고 있을 때, 곽명리(郭明里) 등 청장년 12명과 함께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000여 명의 동지를 권유, 규합하여 대한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로 인해 긴급 출동한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주재소로 강제 연행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다. 불법체포로 구금된 지 3개월 만에 석방되어 고향 울진으로 귀향조치되었다. 이듬해 마을 동지 20여 명을 규합, 울진청년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회장단을 이끌어 나갔다.
1919년 8월 29일 국치일에 나라의 강점을 통석(痛惜)하게 여기고 동지를 모아 일제 타도를 주도하다가 역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1주일간 파출소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다.
1926년 만주로 건너가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 가입한 뒤 항일투쟁에 전념하였으나, 1927년 3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8년 10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년 1개월 15일형으로 감형되었다.
1935년 6월 울진에서 주진황(朱鎭晃)·이우진(李愚眞) 등 20여 명의 청장년동지와 함께 조선독립공작당(朝鮮獨立工作黨)과 독서회(讀書會) 등을 조직하여 조선의 완전 독립을 기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항일민족운동을 국내외에서 전개하다가 울진경찰서에 붙잡혀, 같은 해 7월 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만기출옥하였다. 그 뒤 1945년까지 고향에 체류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