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년(우왕 8) 12월에 설치하였는데, 재추(宰樞) 7,8인을 별좌(別坐)로 삼아 토지를 분급하여 전리(田里)를 균등하게 하도록 하였다. 재추(宰樞) 7∼8인으로 별좌(別坐)를 삼았다고 하는데 실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 정3품) 박형(朴形) 등을 별좌(別坐)로 임명한 사례가 확인된다.
또한 1388년 창왕이 즉위한 뒤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때에는 6도관찰사(六道觀察使)로 하여금 각각 부사(副使)와 판관(判官)을 동원해서 토지측량사업〔量田〕을 하게 했다. 이 사업은 전제(田制)개혁의 사전 작업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절급도감은 토지측량사업과 병행하여 토지분급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왕이 물러나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급전도감(給田都監)이 다시 설치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