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술(子述). 할아버지는 정석희(鄭錫禧)이고, 아버지는 정사현(鄭士賢)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사간·집의 등을 지냈다. 〉1661년(현종 2) 집의로 이민구(李敏求) 서용에 반대하다가 관직이 교체되었다.
이듬해 이지익(李之翼)의 옥사시 병조판서 홍명하(洪命夏)와 의금부도사 최행일(崔行逸)과의 분란에서 홍명하를 두둔하였으며, 안마(按馬)가 형편없어 빨리 외직에 나가야만 된다는 훈련도감 중군 이수창(李壽昌)을 논핵하였다. 그리고 장령으로 부마에게 내린 가자(加資) 명령의 환수를 요구하였다.
비변사당상의 인견(引見: 상급자가 하급자를 불러 봄)에서 국왕의 무기한 궁가(宮家) 면세의 지시를 환수할 것, 민폐가 되는 제궁가나 각 아문의 입안처(立案處)는 혁파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 후에도 집의·사간 등의 대간으로서 국왕의 온천행의 정지를 요청하였다.
궁가 노비 쇄환(刷還: 자신의 위치를 떠나 불법활동을 하는 노비들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 보냄)을 주장하다 파직된 대간의 용서를 주장, 부정을 저지른 지방관의 탄핵, 미납된 각사 노비신공의 탕감 요구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행사하였다.
1666년 승지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청의 사문(査問)으로 국왕이 벌금형을 받은 사건의 책임 소재를 두고 조정이 분란에 빠졌을 때 혐의를 받고 향리에 물러나 있던 허적(許積)의 사정을 제대로 국왕에게 전달하지 않은 죄로 하옥되었다. 이 후 호조참의로 승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