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심경질의』, 『치도의설』, 『의례통고』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퇴계학에 전념하면서도 이형상(李衡祥)·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 등과도 학술 토론을 전개했고, 학파를 초월해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14년(숙종 40)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형 정만양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 명을 모아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 뒤 이남산(尼南山) 밑에 육유재(六有齋)·진수재(進修齋)·옥간정(玉磵亭)·태고와(太古窩)[모길헌(慕古軒)]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투호(投壺)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주(主)요, 기(氣)는 자(資)라 정의해 형 정만양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형제 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형 정만양과 함께 「훈지악보(塤篪樂譜)」를 지었다.
모든 저술을 대부분 형제가 같이 해 『심경질의(心經質疑)』·『치도의설(治道擬說)』·『의례통고(疑禮通攷)』·『개장비요(改葬備要)』·『경학연원도(敬學淵源圖)』·『상의치심단(上醫治心丹)』·『선천심법도(先天心法圖)』·『대학차록(大學箚錄)』 등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塤篪文集)』 62권이 있다.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매산집(梅山集)』
-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
- 『묵헌집(默軒集)』
- 『아주집(鵝洲集)』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입재집(立齋集)』
- 『훈지문집(塤篪文集)』
주석
-
주1
: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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