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극념(克恬). 종영(宗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혹(㷤)이고, 아버지는 기숭(基崇)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의 딸이다.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헌납 등을 지냈다. 1664년(현종 5) 정언으로 호조판서 부재 중에 사안을 처리한 뒤 책임을 판서에게 돌린 호조참판 이행진(李行進)을 논핵하는 데 동조하였다가 체직되었고, 사냥시에 관노를 많이 거느리고 행패를 부린 종실을 탄핵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폈다.
1666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와 청의 사정을 상세히 국왕에게 보고하였으나 청나라에서의 비행과 경솔한 행동이 드러나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이 후 승지로 승진하여 서인의 공격으로 향리에 물러난 허적(許積)에게 소환을 요구하는 국왕의 교지를 여러차례 전달하였다.
1672년 허적을 비난하고 송준길(宋俊吉)과 이상(李翔)의 서용을 주장하는 이민적(李敏迪)의 상소로 국왕과 대간이 대립할 때 대간의 상소를 봉입한 죄로 하옥되었다. 1678년(숙종 4) 도승지로 좌의정 권대운(權大運)과 함께 청 사신을 맞으러 나갔다.
1680년 예조참판으로 상소하여 천하의 일은 성실에서 이뤄진다고 전제하고 국왕에게 성실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1683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제기한 태조의 추상존호(追上尊號)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신중론을 견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