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선산 출신. 정희언(鄭希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鄭由)이고, 아버지는 현감 정철견(鄭鐵堅)이며, 숙부 정석견(鄭錫堅)의 양자로 입후되었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 · 지평 · 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 · 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정승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죽었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 · 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안상도(案上圖)』를 지어 자경(自警)하였으며,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이다.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