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 정윤성(鄭允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鄭攸)이고, 아버지는 정유공(鄭由恭)이며, 어머니는 육씨(陸氏)이다. 정붕(鄭鵬)의 작은아버지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안현감 ·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다음 해 사헌부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곧 이조정랑으로 옮겨 보덕 허침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89년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제조로 임용되자,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했다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으며, 의정부사인의 직에 있으면서 사유에 뽑혔다.
잠시 김해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해 제포(薺浦)에서 왜인과 본국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문제가 크게 되자 경상도경차관이 되어 제포에 파견되었는데, 그 때 본국인의 심문을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의 참지 · 참의를 역임했고, 2년 뒤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김종직 · 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했고, 성종 21년 사유(師儒)로 선발된 13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