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광해군 3) 환속한 승려 이응두(李應斗)와 더불어 점술에 미혹되어 있던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광해군은 모든 일을 그의 말을 들어 행하였으며, 날마다 궁궐에서 음사(淫祠)를 행하였다.
이에 도민(都民)들 사이에 “죽어서 귀신이 되면 가히 궁중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말이 유행하였을 정도였다. 1613년 관상감부정으로 있으면서 도읍을 교하로 옮기려 한 일에 관여하였으며, 뒤에 폐모론에도 적극 찬동하였다. 1621년 사망하자 광해군은 조묘군(造墓軍) 50명을 보내어 묘역을 돕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