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君則), 호는 동리(東里). 정진(鄭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고, 아버지는 생원 정율(鄭慄)이며, 어머니는 원호준(元虎俊)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화순현령·안산군수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 14)에 조신(朝臣)들의 추천을 받아 4품의 산질(散秩)에서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고, 그 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근왕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격하다가 용인·험천(險川)에서 적의 기습으로 대패하였다.
이 때의 충성심으로 패군의 죄까지 면죄받고 전라감사·개성유수를 거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때 사헌부는 문음출신으로 특별한 정적(政績)이 없어 육경(六卿)이 될 수 없다고 강격히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후 형조판서·전주부윤·대사헌·호조판서·함경감사·지의금부사·우참찬 등을 번갈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654년(효종 5) 강화유수가 되어 승천(昇天)·연미(燕尾)·갑곶(甲串)·광성(廣城) 등에 진(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의 출세에는 김육(金堉)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문음출신으로 육경에 오른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시호는 경헌(景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