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집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전해산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의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7년(고종 14)
사망 연도
1909년(순종 2)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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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전해산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의병.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출신.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구한국군 근위대(近衛隊) 참위(參尉)에 근무하였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1907년 9월(음) 동료 이봉래(李鳳來) 등 약 30여 명과 함께 경기도 광주로 이동하여 정철하(鄭喆夏)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군자금 모집활동에 주력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07년 11월 30일 유형 10년을 언도받았으나 형 집행 도중 1908년 6월 유배지 지도(智島)에서 탈출하였다.

정원집은 탈출 후 전라도 지방으로 가서 광주·함평·나주·장성 등지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활동하던 전해산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정원집은 선봉장(先鋒將)의 중요 직책에 임명되었다.

전해산 의병장이 배포한 격문에는 “요즈음 군의 형세가 차츰 떨치고 의로운 깃발이 날로 날리어 (중략) 나도 정원집과 더불어 수십여 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다를 횡행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정원집이 의병부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정원집은 의병부대의 군율을 엄격히 하고 부대를 정비하면서 일본과 수차례 격전을 치렀다. 정원집은 포를 잘 다루었기 때문에 일본군 토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8년 1월 말 나주 고막원(古幕院)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였다. 정원집은 “내가 혼자 들어가서 일이 여의하면 나올 것이고, 일이 여의치 못하면 포를 쏠 터이니 포 소리를 듣거든 일제히 쏘아라.”라고 지시하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부대를 지휘하던 중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장은 정원집의 전사소식을 듣고 “나의 믿던 사람을 잃었으니 큰일은 틀렸구나.” 하고 통한해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69)
『한국독립사』하(김승학, 1965)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강길원, 『역사학보』101, 1984)
집필자
유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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