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방무(邦武)·유성(由盛), 호는 성재(醒齋). 정찬우(鄭纘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순인(鄭純仁)이고, 아버지는 성균진사 정경(鄭褧)이며, 어머니는 평강채씨(平康蔡氏)로 진사 채순(蔡恂)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초수되었다. 이 후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성균관전적을 거쳐, 공조·형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예조좌랑으로 재직시에는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후 정언이 되어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평안도도사를 거쳐 1573년 지평이 되고, 직강과 형조·예조·호조의 정랑을 지낸 뒤 경상도경차관으로 나갔다.
이 때 민폐를 많이 끼치고, 무뢰배인 서제(庶弟)를 이목으로 삼아 토색(討索)을 심히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대사헌 심의겸(沈義謙)이 이를 변호하여 병을 명목으로 체직되었다. 1576년 경기어사를 거쳐 헌납에 이르렀다.
이 때 심의겸·김효원(金孝元)의 대립이 있자, 대사간 정지연(鄭芝衍), 부제학 이이(李珥) 등과 더불어 그들을 외보(外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후 장령·봉상시첨정·사예·사성·사섬시정을 거쳐, 1578년(선조 11) 다시 어사로서 양계·하삼도를 순무하고 정주목사를 역임한 뒤 춘천으로 내려가 있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성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