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에서 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58년 봄에 수로를 공사하던 중 패층이 노출되어 신의주 역사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이 유적은 장마로 인해 원래의 자연퇴적층위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무너져내려 거꾸로 퇴적되어 교란된 유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곳곳의 퇴적상태가 분명하지 않아 유물해석상의 문제점이 많은 곳이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중서부지방의 뾰족바닥[尖底]빗살무늬토기와 함께 서북ㆍ동북지방의 납작바닥[平底]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평저나 첨저의 복원가능한 토기에는 전면에 사선을 이용해 단사선문이나 횡주어골문을 시문하였다. 구연부는 직립이 대부분이나 외반된 것도 있으며, 변형 번개무늬[雷文]가 시문되어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토기의 무늬는 서북ㆍ동북지방의 빗살무늬토기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 많으나 이따금 중서부지방의 요소도 보인다. 횡주어골문ㆍ단사선문ㆍ융기문ㆍ뇌문 등이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융기문 중에는 점선으로 된 것, 횡선의 한 줄 또는 몇 줄 밑에 세로로 곡선이나 직선이 몇 줄씩 달려 있는 형태도 있다. 이런 형태는 중국 요동지방과 러시아 아무르강유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석기류는 연석(碾石)ㆍ어망추가 있으며, 골기로는 칼ㆍ예쇄ㆍ송곳 등이 출토되었다. 장식품으로는 상부에 구멍이 뚫려 있는 제형(梯形) 석제품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한반도의 동북ㆍ서북ㆍ중서부지방의 문화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문화완충지대이다. 이러한 문화양상은 청천강을 경계로 해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 유적의 주인공들은 주로 어로와 채집에 바탕을 둔 경제생활을 영위하면서 농경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신석기시대 말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