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신백(愼伯), 호는 돈곡(敦谷). 돈녕부판관 정흠(鄭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정효준(鄭孝俊)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정식(鄭植)이며, 어머니는 엄성(嚴惺)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0년(현종 1) 봉교·정언·지평을 역임하였는데, 사헌부지평 재직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후 장령·헌납·집의·수찬·필선 등의 관직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경상도관찰사 재직시 방왜(防倭)를 목적으로 성주(星州)에 독용산성(禿用山城)의 축성을 시작하여 1675년(숙종 1) 10월 11일에 완공하였다.
1677년(숙종 3) 도승지 재직시 왜관(倭館)의 역사에 목재를 과다하게 사용하였다는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의 탄핵을 받아 양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 후 복권되어 형조참판, 도승지,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나, 왕후를 모함한 이옥(李沃)을 벌주라고 상소한 김정로(金井老)를 오히려 치죄하였다는 정언 임원구(任元耉)의 논계(論啓)로 인해 다시 파직되었다.
그는 단종(端宗)의 고모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인 찬성(贊成) 정미수(鄭眉壽)의 후손으로, 그의 사후에 진행된 단종의 복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단종과 그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신주(神主)를 그의 집에 봉안하였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