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술(士述).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지화(鄭至和)이고, 친부는 정재후(鄭載厚)이며, 양부는 정재중(鄭載重)이다. 어머니는 박순의(朴純義)의 딸이다.
1704년(숙종 30)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06년에 설서(說書)를 거친 뒤 지평(持平)·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교리(校理)·문학(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713년에는 성주안핵어사(星州按覈御史)로 파견되었으나, 옥사(獄事)를 마무리짓지 않고 상경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 후 태천수령, 보덕(輔德) 등을 지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주로 언로(言路)에 관계된 일을 맡았는데, 관직생활 초기 병조판서 이이명(李頤命)이 자의적인 일처리로 파직될 때 그가 입시(入試)한 세자시강원 관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체차(遞差: 관직이 교체된 뒤 일정기간 다른 관직을 받지 못한 상태)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