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희천(希天). 정순양(鄭純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수연(鄭壽淵)이고, 아버지는 정광은(鄭光殷)이다. 어머니는 김신경(金愼慶)의 딸이다. 아우는 판중추부사 정창순(鄭昌順)이다.
1751년(영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1753년에 정언이 되었으며, 이후 지평·문학, 호남어사, 교리, 평안도어사, 헌납·수찬·부수찬·부응교·집의·사간 등을 지냈다. 1768년에는 승지에 제수되고, 이듬해 형조참판, 대사간·대사헌까지 지냈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한성부의 좌윤·판윤, 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 대사헌, 개성부유수, 판의금부사, 병조·현조·예조의 판서, 의정부의 좌·우참찬, 판의금부사, 평안도관찰사 등 대체로 중앙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63년(영조 39)에 어버이의 병환을 이유로 경출(徑出:숙직 중 교대할 사람과 교대를 하기 전에 물러나감)한 것이 죄가 되어 교리에서 중림찰방(重林察訪)으로 좌천된 것으로 보아 효성이 극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사학교수(四學敎授)로 재직하면서 노자(老子)와 관련된 제목으로 과제를 낸 죄로 서용되지 않는 법을 적용당하기도 하였다.
이 한가지 사실로 그가 도학에도 심취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그의 학문의 뛰어남은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1781년(정조 5)『세조보감(世祖寶鑑)』 찬집당상으로 열조보감(列朝寶鑑)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일성록(日省錄)』을 교정하고, 그 이듬해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감인당상(監印堂上)이 되었다. 1785년에는 『궁원의(宮園儀)』 편교(編校) 당상과 『갱장록(羹墻錄)』속록의 편찬에 참여하는 등 사서의 출판에 크게 공헌하였다.
1790년(정조 14) 평안도관찰사 재직 때 흉년에 백성을 제대로 진휼치 못하고 막료의 말에 현혹되어 정무를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또, 막비 윤창문(尹昌文)·김남초(金南楚) 등이 칙사접대비 10만 냥을 유용한 사건의 책임을 물어 중화부(中和府)·운산군(雲山郡)·삭주부(朔州府) 등으로 유배되었다. 1794년에 정간(靖簡)이란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