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익지(翼之), 호는 휴옹(休翁)·휴헌(休軒)·휴암(休菴). 한성참군(漢城參軍) 정수후(鄭守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인수(鄭麟壽)이고, 아버지는 시정(寺正) 정사신(鄭思愼)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사직 안혼(安混)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주서·예조좌랑·정언·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있을 때 그의 종사관이 되어 함경도·평안도 등을 순찰하였으며, 황해도암행어사를 역임하였다.
1602년 이후 정언·지평을 지냈는데,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대북파의 영수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성혼(成渾)을 탄핵하자 이를 극력 변호, 정인홍을 공격하다가 권신들의 뜻에 거슬려 단천채은관(端川採銀官)으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어천찰방(魚川察訪)을 지냈다.
1608년 이후 중앙에 돌아와 교리·성균관사예 등을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성천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벼슬에서 탈락되어 산반(散班)으로 지내다가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분원승지(分院承旨)가 되었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 극간하다가 진도·종성·광양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나와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귀양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인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종성의 종산서원(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휴옹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