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문중(文仲). 할아버지는 정도흥(鄭道興)이고, 아버지는 정여직(鄭汝稷)이며, 어머니는 여광억(呂光億)의 딸이다.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1년에 한림권첩(翰林圈帖)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무신의 자제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후에 정언·지평·장령·헌납·승지·영광군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774년(영조 50) 영광군수 재직시 백성에 대한 진휼을 잘하였다 하여 왕으로부터 호랑이 가죽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1776년(정조 즉위년) 지평 이제만(李濟萬)의 상소로 진휼상황을 과장되게 보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해직, 유배되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 17)에 이선온(李善溫)·윤홍렬(尹弘烈) 등과 함께 다시 서용되었으며, 1795년 혜경궁 환갑 때 행부사직으로 있던 그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