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왕서(王偦).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 柳氏)이다.
1103년(숙종 8) 제안후(齊安侯)에 봉(封)하여졌다.
1106년(예종 1) 익성치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상서령 수사공 상주국 제안후(翊聖致理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尙書令守司空上柱國齊安侯)에 임명되어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200호를 받았다. 1110년에는 봉화공신 수사도(奉化功臣守司徒)가 되어 식읍 2,500호를 받았다.
1114년에는 동덕공신 검교태보 수태위(同德功臣檢校太保守太尉)로 식읍 300호, 식실봉 250호를 받았고, 1122년(예종 17)에 제안후에서 제안공으로 봉하여졌다.
인종 재위시 권력을 장악한 이자겸(李資謙)이 왕족을 시기하여 대방공(帶方公)과 대원공(大原公)을 귀양보내자 호종(扈從) 인원을 없애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접견하지 않고 술도 함부로 마시지 않으며 스스로 절제하여 화를 면하였다. 시호는 사절(思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