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771년(영조 47)에 칠도 유생들은 조선왕조 시조인 사공 이한(李翰)과 동비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는 시조묘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태종대에 경기전 정전(보물, 2008년 지정)을 세웠고 영조대에는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선원경봉지지로서 전주로 숙원을 굳혔는데, 동학혁명군으로 전주가 한때 점령되자 태조 영정과 함께 조경묘 위패도 위봉산성(威鳳山城)에 피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건지산(乾止山)에는 조경단을, 발산(鉢山)에는 목조의 유허비를, 오목대(梧木臺)에는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세우게 되었다. 1899년 3월 11일에 궁내부특진관인 ‘조경단봉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으로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검분이 실시되었다.
설단(設壇) · 수비(竪碑) · 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하고, 동서 3,360척, 남북 3,520척의 경내 묘소는 모두 없애버리고 창경토지나 단의 좌우 계곡에 인접된 전답은 본단 수봉궁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하였다. 마침내 고종 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