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여완(汝完), 호는 북계(北溪). 아버지는 조수복(趙壽福)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서흥군(瑞興君) 이춘억(李春億)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었고, 1626년(인조 4) 덕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37년에 청암찰방(靑巖察訪)으로 제수받았으나 1년도 못되어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왔으며, 1640년에 종묘직장(宗廟直長)으로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함창(咸昌) 황령사(黃嶺寺)에서 친구 정경세(鄭經世)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군기를 관리감독하였으며, 또 적과도 무려 70여 번이나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이 사실은 이봉(李逢)장군이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李埈)과 자신의 동생 및 자식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창의병을 소집하였으나 벌써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조광벽은 평생을 임진란, 병자호란 등 국내외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솔선하여 창의를 일으켜 몸소 적들과 대적하여 싸웠다. 이러한 공헌으로 200여 년 후에 연악서원(淵嶽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북계집(北溪集)』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