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회보(晦甫). 조변융(曺變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구서(曺九叙)이고, 아버지는 우찬성 조계상(曺繼商)이며, 어머니는 이의무(李宜茂)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도사에 재직하던 중 왕을 영접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1538년 장령으로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를 지내고, 1541년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며, 그 뒤 판결사·병조참의·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함경도병사와 관찰사를 지낸 다음 1548년(명종 3) 호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대사헌·한성부좌윤·평안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발발하자 경상도도순찰사로 활약하였으며, 좌참찬·호조판서 등을 거쳐 1558년 우찬성에 이르고, 1561년 판중추부사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창녕군(昌寧君)에 습봉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