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異名)은 일명(一明). 강원도 양양 출생.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6·10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평양에서 이준태(李準泰)·조원숙(趙元淑)·심은숙(沈恩淑) 등과 고려공산청년회에 간여하여 일제경찰에 잡혔다가 소련으로 도피, 그곳에서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녔다.
1929년 코민테른으로부터 김단야(金丹冶, 일명 泰淵)·김정하(金鼎夏)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조직의 지령을 받고 귀국하여 한동안 원산에서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9년 김단야 및 뒤따라 입국한 권오직(權五稷)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서울에서 박민영(朴珉英)과 함께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화하려 하다가 1930년 1월 일제경찰에 잡혀 1933년 10월까지 복역하였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1938년 서울에서 술장사 등으로 공산주의활동에서 이탈하였다. 1944년에는 전향한 사상운동자들의 친일단체인 야마토 쥬쿠(大和塾)에 참여하였다.
8·15광복이 되자 장안빌딩에서 이영(李英)·정백(鄭栢) 등의 서울계와 조동호(趙東祜)·이승엽(李承燁) 등 자신의 계보인 화요회계가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 결성을 의논하여 8월 16일 장안파 조선공산당을 발족하였다.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해방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상임위원 및 토지농업문제연구위원을 지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 부부장까지 역임하였으며, 1947년 6월 남조선노동당기관지인 『노력인민』 주필로 활동하다가 12월에 월북하였다.
1948년 9월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내고, 1950년 6·25전쟁 이후 서울시인민위원장 이승엽과 함께 서울에서 활동하였으며, 1953년 이승엽·임화(林和) 등과 함께 간첩혐의로 사형에 처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