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에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계층에 의하여 소집이 강조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는 2년 만인 1923년 1월 3일 개막되었는데, 국내의 각 지역단체 대표 140여명이 모인 가운데 공산당계가 20%를 점하고 있었다.
이 대회가 모스크바의 자금으로 충당된 만큼 공산당의 발언권은 매우 컸으며, 이때 김정하(金鼎夏)는 박건(朴健, 적기단조직) 등과 함께 이 단체를 조직하고 그 대표로 상해 모이당(慕爾堂)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김정하는 공산당계 인물 30여명과 같이 열렬히 임시정부를 불신하는 발언과 함께 임시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파(創造派)의 강경론을 폈다. 이 단체는 그 뒤 국민대표회의가 같은 해 5월 말 결렬되자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