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모아호동사건(帽兒胡同事件)이 점차 잠잠해지고 고명복의 집에서 가지고 나왔던 물건을 처분해서 돈이 생기자, 정화암(鄭華岩) · 이회영(李會榮) · 이을규(李乙奎) · 이정규(李正奎) · 백정기(白貞基) · 유자명(柳子明) 등이 북경(北京)에서 독립운동을 체계화시킬 목적으로 1924년 4월 조직하였다.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한 보복심리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무정부주의자 신채호(申采浩)는 북경 순치문(順治門)내의 석등암(石燈庵)에서 역사편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유림(柳林)은 청두대학(成都大學)에 재학 중이어서 연맹창립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뒤에 합류하였다.
이회영 · 정화암 등 10여 명이 연맹을 조직, 활동하자 일본관헌은 이들을 체포하려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은 굳건한 자세로 연맹을 구심점으로 운영해 나갔고 독립운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기 위해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창간, 보급하였다.
순간지로 발행되어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 진영내에 일고 있던 파벌주의적 경향성에 지양을 요구하면서, 자유연합의 조직원리에 따른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의 총력을 결집하도록 호소하였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표방하는 공산주의의 볼셰비키공산혁명 이론을 비판하였다.
『정의공보』는 9호까지 발행되었으나 자금난으로 휴간되었다. 그 뒤 1928년 5월『탈환(奪還)』으로 제호를 바꾸어 속간하였으나, 역시 자금난으로 휴간된 뒤 더 이상 속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단체 역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이을규 · 이정규 · 백정기 · 정화암 등은 상해(上海)로 떠나 갔고, 유자명과 이회영만 북경에 남아 국내와 연락을 취하였다.
그 뒤 이을규 형제가 국내로 압송되고, 이회영이 1932년에 죽은 뒤 정화암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연맹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며 항일투쟁을 계속 이끌어 갔다.
1932년훙커우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를 계획하였으나, 윤봉길(尹奉吉)이 먼저 거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33년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를 계획하였으나 이 또한 3월백정기 · 이강훈(李康勳) 등이 잡힘으로써 좌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뒤 연맹이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뒤로는 유림이 중심적으로 이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