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11년 정악을 유지, 보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음악교육기관.
연원 및 변천
기능과 역할
수업시간은 조선악과가 매주 6회, 서양악과의 성악전공이 매주 6회, 기악전공은 매주 5회였다. 수업료는 기악이 매월 1원, 성악은 매월 50전이었고, 서양악과의 풍금·사현금은 매주 1회로 하되, 매회 20이었다.
수업기간은 가곡과 거문고는 1년, 가얏고와 단소는 6개월, 양금은 3개월, 풍금·사현금은 각 1년이었다. 대표적인 교사는 하규일(河圭一)·명완벽(明完璧)·함화진(咸和鎭)·김경남(金景南)·김인식(金仁湜) 등이었다.
연구위원은 홍긍섭·한만용(韓晩容)·함재운(咸在韻)·명완벽·하규일·김인식의 6명으로 ≪악학궤범≫ 3책을 편집하였고, 거문고보·양금보에 의한 남창·여창 반주보 4책을 편집하였으며, <영산회상>과 <여민락>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採譜:악보를 만드는 일)하였다. 이 가운데 김인식이 5선보로 채보하여 출판한 양금을 위한 <영산회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1913년 10월 현재 이왕가(李王家) 잡문서(雜文書)에 나오는 졸업생과 재학생을 보면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를 합해 졸업생이 제1회(1912) 18명, 제2회(1913) 20명이었으며, 재학생은 49명이었다. 이 후 정악전습소의 활동은 1916년부터 차츰 둔화되었다.
정악유지회의 지원이 흐려지자 차츰 풍류방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극심하여진 1944년에는 잠시나마 문을 닫게 되었고, 광복 후는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으로 다시 문을 열어 현재에 이른다.
1943년 무렵까지 정악전습소를 지켜온 사람은 최영재(崔永載)·김인수(金仁洙)·민완식(閔完植)·김윤덕(金潤德)·최성환(崔星煥) 등이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一覽
- 『여명의 동서음악』(장사훈, 보진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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