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언관·언론연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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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문헌
최승희가 조선전기의 언관 제도 및 기능 등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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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최승희가 조선전기의 언관 제도 및 기능 등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내용

조선 초기 언관제도 및 기능, 언론의 내용을 고찰한 책이다. 1976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서 한국문화연구총서 제17집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 초기에 언론의 창달 여부가 유교 정치의 내용을 가늠하는 척도였다는 관점에서 당시 언관·언론이 정치 방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피고 있다.

시기는 1392년(태조 1)에서 1478년(성종 9) 홍문관 설치 이전 시기까지의 언관·언론을 연구대상 시기로 하였다. 내용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에서는 대간제도(臺諫制度)의 성립과 그 기능을 분석하였다. 여기에서 저자는 제도적으로는 당나라·송나라와 고려의 제도에서 영향을 받은 조선 초기 대간 제도는 태조대 이래 수차의 개혁을 거쳐, ≪경국대전≫의 사헌부·사간원의 제도로 정비되었음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와 사간원은 별개 기관이었으나 실제 기능에서는 언론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언관으로서 밀접한 연관을 지녔으며, 간쟁(諫諍)·탄핵(彈劾)·시정(時政)·인사(人事)에 관한 언론 활동을 통해 왕·권신·전조(銓曹)의 전횡을 견제하고 관기(官紀)를 숙정하면서 양반관료체제를 확고히 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제2장에서는 세종대에 설치된 집현전의 관원이 말년에 언관화하는 점을 고찰해, 대간의 언론이 별도로 존재하나 그 취약성과 한계성을 보완하기 위한 언관의 구실을 집현전관이 담당하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뒤에 집현전의 직제와 기능을 계승해 1478년에 설치되는 홍문관이 대간과 더불어 언론 삼사(三司)를 이루게 되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제3장에서는 언관·언론과 왕권과의 상호 관계를 고찰하면서, 언관의 언론을 통해 군주의 과오나 전제를 막고 관리의 기강을 숙정하며 정치의 시비를 가려 유교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언관 제도의 이상이었음을 밝혔다.

여기에 당시에 언관의 성분 구성이나, 군주나 집권자의 언관에 대한 태도와 상호 이해관계,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언관의 언론은 내용의 변화와 활동의 소장(消長)이 있었음을 시기별로 밝히고 있다.

제4장에서는 조선 초기 언관·언론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각 왕별·언론내용별·언관별 언론활동을 부표(附表)로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이 책은 태조에서 ≪경국대전≫ 성립 시기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을 대상 자료로 해 언관·언론 관계기사들을 거의 모두 발췌해 철저히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 자료의 철저한 구사와 그 치밀성 및 신중성이 크게 돋보인다. 아마도 실록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이 연구로서 일단 마무리된 듯하다.

그리고 언관 제도도 소상히 밝혔지만, 언관의 기능과 언론의 내용 분석에 역점을 둠으로써 초기의 집권 체제상의 언관의 위치와 비중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역대 왕권과의 관계에서 언론의 성쇠와 집현전관의 언관화 등을 밝힌 것은 초기 정치 체제의 구체적 이해를 크게 진전시킨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서평 조선초기언관·언론연구」(이태진, 『역사학보』 80,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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