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덕보(德輔), 호는 창주(滄洲). 조인(趙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회조(趙懷祖)이고, 아버지는 조경운(趙慶雲)이며, 어머니는 김응무(金應武)의 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장령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관찰사로 해주 앞바다의 섬으로 피신하였다가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전직되었으며, 그 뒤 판결사를 지냈다.
1594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비변사의 건의로 정병(精兵)을 모집하였으며, 이에 속오법(束伍法)이 최초로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당시 시급한 포수(砲手) 양성에 노력하고 있던 각 지방군의 속오군화(束伍軍化)가 촉진되었다. 1595년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공조참판·길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