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놓은 종묘에서 지내는 유교 의례이다. 대사에 해당하는 의식으로, 세조 이후 속악을 사용한 의례가 정착되었고, 『국조오례의』에 세부 절차가 규정되었다. 절차는 크게 신관과 궤식으로 이루어진다. 신관은 영신과 전폐로 구성된다. 궤식은 진찬, 초헌, 아헌·종헌, 음복, 철변두, 송신, 망예 등의 절차로 구성된다. 종묘제례는 오늘날 국가무형유산과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제례는 전통 제례의 가치 보전을 위해 해마다 봄가을에 봉행되고 있다.
종묘(宗廟)는 조선에서 천명을 시행한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공간이다. 조선은 친왕 등급의 제후국을 자처하여 태묘(太廟)를 종묘로 지칭하였다. 조선이 지향한 종묘의 제도는 오묘제(五廟制)인데, 태조(太祖)와 국왕의 선대 4세대 국왕의 신주를 안치하여 제사하고자 하였다. 각 실에는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배치하였고, 항렬이 같은 경우에는 각각 신실(神室)을 달리하지만, 합쳐서 한 세대의 묘제로 인식하였다. 오묘제가 유지되었지만, 형제간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신실은 그만큼 추가되었다.
조선에서는 유교식 국가의례를 실천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고려의 태묘 제례를 배제하고, 중국에 국가의례를 참조하여 독자적인 의례를 모색하였다. 조선의 유교 의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과 송의 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고제(古制)와 명나라의 시제(時制)를 두고 강한 논의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제사 절차에 부합하는 음악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심도 높은 검토가 진행되었다.
세종(世宗) 때 아악(雅樂)을 전면 채용하는 정비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창제되면서 새로운 조선의 속악(俗樂) 제도가 마련되었고, 1464년(세조 10)에는 속악만을 사용하는 새로운 종묘의례가 시행되었다. 조선에서 독창적으로 제정한 의례 절차와 조선의 속악을 사용하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1474년(성종5)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정되었고, 조선시대의 정형화된 표준 절차가 되었다.
종묘는 태조와 현재의 국왕을 기준으로 네 세대의 선왕과 왕비의 신주를 안치하는 오묘제로 운영하고자 하였다. 태조는 신주를 옮기는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운영되었고, 태조에 더하여 현 국왕을 기준으로 앞선 네 세대가 종묘의 제사 대상이었다. 새로운 국왕과 왕비가 추가되면, 네 세대를 벗어난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철거하였는데, 이렇게 신주를 내오는 것을 조천(祧遷)이라 한다. 조선에서는 조천된 신주를 종묘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서 별도로 제사하였다.
영구적으로 종묘에서 제사 지내도록 결정된 국왕의 신주는 조천하지 않았는데, 이를 세실(世室)이라 한다. 세실의 운영으로 종묘의 신주는 19실까지 증가하였다. 제사 대상이 늘어나면서 의례의 실행 시간이 비례하여 증가하였고, 국왕의 친제(親祭)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조(正祖)는 종묘의 신실이 늘어난 상태에서 의례를 간소화하여 친제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이후 국왕의 친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
종묘제례에서 영조(英祖)에 의해 국왕이 직접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절차에 참여하도록 조정되었다. 대한제국에서 오묘를 칠묘로 확대하는 칠묘제(七廟制)를 전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파행적인 형태로 변형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전주 이씨 대종회를 중심으로 종묘제례가 재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 수정과 보완 작업이 병행되고 있다. 대제(大祭), 또는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 국가 제사는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로 등급을 구분하는데, 종묘제례는 대사에 해당되는 의례였다. 국왕이 초헌관으로 참여하는 친제가 원칙이었지만, 실제의 제례에서는 대신이나 왕세자가 대신하여 초헌관을 하는 섭사(攝祀)가 일반적이었다.
종묘제례는 천도(天道)가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된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네 번 시행하고, 납일(臘日)에도 큰 제사가 시행되었는데 이를 시제(時祭)라 하였다. 시제는 계절의 첫 달 상순(上旬)에 시행하였다. 정초 · 추석 · 단오 · 한식 등의 명절과 매월 1일과 15일에도 정기적인 제사가 있었다. 새로운 진상물을 올리는 천신(薦新) 의식이 지정된 날에 실시되었고, 빌어야 할 사안이 있거나 특별한 사안의 경위를 보고[告]하는 등의 이유로 부정기적인 기고(祈告) 의식이 진행되었다. 조천된 신주를 모신 종묘 영녕전에는 봄가을에 종묘와 동시에 제사가 시행되었다. 이 종묘 영녕전 제사에 국왕은 참여하지 않았다.
종묘제례에 행하는 의례는 유형별로 절차에 차등이 두어졌다. 시제는 7일 전부터 재계하며 준비하였고, 삼헌관을 두어 세 번 술을 올리는 절차가 적용되었다. 명절과 삭망에는 한 사람의 헌관이 한 차례 술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기고 의식은 단헌관이 한 번 술을 올리도록 하였지만, 날짜를 달리하여 음복의 절차를 별도로 시행하는 차이가 있었다.
종묘제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이 두어진 것은 시제의 절차였다. 『국조오례의』 시제 의주에서는 준비 절차에 이어, 본 절차를 주1과 주2으로만 분류하고 있다. 준비가 완료되면, 본 행사가 시작되는데 신관은 영신(靈神)과 전폐(奠幣)로 구성된다. 영신은 헌가(軒架)에서 보태평(保太平) ‘희문(熙文)’ 악곡에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사배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전폐는 등가(登歌)에서 희문을 연주하고 전폐에 해당하는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귀신이 임재했다는 의미로 각 신실의 국왕과 왕비 신위에 폐백을 올린다.
궤식은 진찬, 초헌, 아헌 · 종헌, 음복, 주3, 송신, 주4 등의 절차로 구성된다. 진찬은 따뜻한 상태의 제수를 올리는 절차인데, 희생으로 쓰이는 삶은 소 · 양 · 돼지를 이때 상에 차린다. 초헌은 가장 중요한 절차로 초헌관이 각 실에 첫 작(爵)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등가에서 보태평의 곡을 연주하고, 노래와 문무(文舞)에 해당하는 춤이 진행된다. 아헌 · 종헌은 아헌관과 종헌관이 둘째, 셋째 작을 올리는 절차이다. 헌가에서 정대업(定大業) 곡을 연주하고, 정대업 노래와 무무(武舞)에 해당하는 춤이 진행된다.
음복은 귀신이 감응했다고 간주하여 초헌관이 복주를 마시고 주5을 받는 절차이다. 이로써 귀신과 행례자의 상호 작용이 이루어진다. 음복에 이어 제수를 치우는 상징적 행위로 주6과 주7를 움직이는 철변두를 한다. 등가가 주8을 연주한다. 귀신과 작별하는 송신의 절차가 헌가의 주9 연주 속에 네 번 절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송신이 마감되면, 주10이 선언되고 초헌관인 국왕이 퇴장한다. 마지막으로 축문과 폐백을 땅에 묻는 망예의 절차로 모든 과정이 종료된다. 18세기 영조는 땅에 묻는 망예를 태우는 망료(望燎)로 개정하였고, 국왕이 이 절차까지 현장에 있는 것으로 절차를 수정하였다.
하늘과 교감하기 위해 진행되는 종묘제례는 매개로 사용되는 제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상의 서쪽에 12변(籩), 동쪽에 12두(豆)를 두는데, 각 제기에는 종류가 다른 제수를 서열에 따라 차린다. 신위 앞에는 제주를 담는 세 개의 작을 두고, 천지를 형상화한 제기인 보(簠)와 궤(簋)에 익힌 곡식을 담는다. 이와 함께 희생으로 우(牛) · 양(羊) · 시(豕)를 준비한다.
12변두와 우 · 양 · 시 희생은 대사 등급의 의례에 사용한다. 소와 양, 돼지는 날것과 익힌 것을 차리며, 희생에서 나온 기름과 털은 제사 시작할 때 태워서 향을 일으키도록 한다. 삼헌에는 각각 종류가 다른 술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17세기 숙종 대에는 제작 기법이 단절되어 한 종류의 술을 사용하였다. 헌관이 음복에는 제주와는 다른 복주(福酒)를 사용하였고, 신관 절차에서 술을 땅에 붓는 관지(祼地)할 때는 관지를 위한 술이 준비되었다.
종묘제례는 국가무형유산과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통시대에 종묘제례는 현재의 국왕이 천명의 승계를 선언하고, 하늘과 교감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2025년 현재는 국가와 인류의 무형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형태가 보존되고 있으며, 천명 앞에 겸허하고자 했던 통치의 자세를 기리는 의미를 담아 매년 5월과 11월에 봉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