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필. 조선 말기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종사(從事)로 있던 이정규는 이 밖에도 『창의견문록(倡義見聞錄)』·『육의사열전(六義士列傳)』·『항재집(恒齋集)』 등을 지어, 한말 처음으로 의병전쟁을 일으킨 스승 유인석과 동문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서상렬(徐相烈)·주용규(朱庸奎)·홍사구(洪思九)·이범직(李範稷) 등 6의사의 사적을 후세에 전하려 하였다.
이정규의 증손 이영호가 지니고 있다.
그의 서술 태도는 매우 객관적이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선생과 동지들의 공로로 돌리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 주고 있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의 체험기를 기록하고 있으나, 특히 을미의병의 발단 부분은 다른 어느 기록보다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먼저 을미의병의 배경으로 1894년(고종 31) 6월 20일의 이른바 갑오개혁을 들고, 이 개혁의 본질이 한국을 소일본(小日本)으로 만드는 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95년 봄에 다시 복제(服制)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자 유인석은 5월 15일 충청북도 제천군 장담(長潭)에서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였다.
이 때 500∼600명의 유생이 모였는데 일종의 수구(守舊) 시위였다. 이 자리에서 서상렬 등이 의병 거사를 주장하였으나 유인석이 만류하였다. 이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반포되자, 유인석은 문하의 유생들을 모아 놓고 의병 거사가 불가피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환란을 당하여 지식인으로서 처신할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첫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하는 일)이요, 둘째는 거이수지(去而守之: 이 땅을 떠나 수절하는 일)요, 셋째는 자정(自靖: 스스로 몸을 깨끗이 가지는 일)이라 하였다.
이 때 이필희(李弼熙)·안승우·이범직은 의병 거사를 주장하고, 나머지는 이 땅을 떠나거나 떠나지 않고 수절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1896년 1월 10일 안승우·이춘영·이필희·서상렬이 강원도 원주에서 먼저 거사하였다. 여기에는 산포대장인 김백선(金伯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천의병의 군세는 내부에 잠입한 간첩의 공작으로 크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1월 28일 마침내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호좌창의군(湖左倡義軍)이 조직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때 광경을 “선생이 짓베 두루마기, 짓베 복건, 백립(白笠)에 베망건으로 단에 올라서 그 날로 장수의 직임을 배정하니 중군 이춘영, 전군 안승우, 후군 신지수(申芝秀), 선봉 김백선, 조련장 안성해(安成海)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인석은 곧 숙군(肅軍)을 단행, 군기를 확립하고 1896년 2월 17일 충주를 공격·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이 책에는 을미의병의 핵심 부대인 관동창의군이 처음으로 거병한 기록 이외에도 이정규 자신이 체험한 여러 가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유인석의 명을 받아 서울에 가서 개화 관료에게 의병 거사의 불가피성을 설득한 문서를 전달한 사실이나, 요동에 가서 청나라의 군사 원조를 요청한 일, 그리고 유인석을 위해 『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반포한 사실의 기록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