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거주하게 된 것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원동(遠東)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였기 때문이다.
1863년 13호의 한인 농가가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나오는 포시엣트 마을에 거주한 이래 매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증가하였다. 특히 1869년의 대흉년을 계기로 많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옥토를 만들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빼앗기고 다시 북상하면서 농지를 개간하였다.
한편 기우는 나라를 해외에서나마 구하려는 우국지사들이 중국과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생성된 신한촌(新韓村)은 당시 해외에 있는 유일한 한인 집거지였으며,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독립군이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던 곳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중심에서 먼 연해주는 구 황제군, 체코군, 백군, 홍군 등이 혼재하는 혼란된 지역이 되었고 여기에 4대 강국이 간섭하여 이른바 ‘시베리아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한인 의병부대는 러시아 유격대가 당시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할 때 동참하여 열심히 싸웠다.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신한촌을 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철수하고 원동지역에 평화가 회복되자, 소련은 집단농장을 건설하고 소비에트화를 추진하였다. 이에 한인들도 앞장서 집단농장 건설에 협력하였다.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중일전쟁을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장차 소련과 일본이 전쟁을 할 것이고, 그때 전쟁터는 일본에 가까운 연해주가 될 것이며, 소련과 일본이 전쟁하면 한인들은 일본 편이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 결과 당시 한인들을 일본의 첩자라는 구실로 한인 지도자급 인사 약 2000명을 처형하고 약 18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빠짐없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7년 9월, 추수를 끝낸 한인들은 마을 단위로 가져갈 수 있는 짐을 모두 들거나 머리에 이고 화차에 승차하였다. 가축을 싣던 벽이 허술한 화차라서 기차가 달리면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약 한 달을 이러한 열차에 시달리며 시베리아를 횡단하였으며, 가는 도중 영아와 노인들은 상당수 사망하였다.
마침내 하차 명령을 받고 한인들이 화차에서 내린 곳은 중앙아시아의 반(半)사막지대였다. 중앙아시아는 유라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몹시 더운 곳이고 강우량이 적어 풀만 조금 자랄 뿐이다.
겨울에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았으며 물가에 있는 사람들은 갈대로 움막을 짓고 살았다.
봄이 되자 한인들은 강을 찾아 운하를 파고 논을 만들어 가져간 볍씨를 뿌려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중앙아시아는 여름에 태양열이 풍부하여 물만 있으면 벼농사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따라서 첫해부터 풍년이었고 계속 풍년을 맞아 3년 만에 원상을 회복하였다. 그들은 유목민에게 농사기술을 보여주고 쌀을 보급하여 ‘쌀하면 한인, 한인하면 쌀’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의 시련은 벼농사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제 이주당한 다음해인 1938년, 스탈린은 특명을 내려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학과를 폐지하여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인은 자기가 거주하는 공화국을 벗어나는 여행을 못하였으며, 적성민족으로 낙인 찍혀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오히려 성실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민족성을 발휘하여 한인들이 이룩한 집단농장은 모범농장들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노동 영웅의 칭호를 가장 많이 받은 모범민족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한인들의 농장이 수도인 타슈켄트 남부에 분산되어 있고 이들 중에서도 ‘김병화농장’과 ‘포리토젤농장’이 유명하다. 김병화농장은 원래 ‘북극성농장’이었다.
농장장이 된 김병화는 농장을 최우수 농장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노동 영웅 칭호를 두 개나 받았고, 그의 사후(死後) 그 농장을 ‘김병화농장’이라 부르며 타슈켄트의 한 거리를 ‘김병화거리’라 명명하였다.
포리토젤농장은 황만금이 농장장이 되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하였고, 소련에서 유일하게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이 되었다. 관광공사에 등록되었다는 것은 외국사람들에게 소련에서 모범적인 농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농장임을 말한다. 소련에는 3만여 개의 집단농장이 있었으나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은 포리토젤농장 뿐이다.
카자흐스탄에서도 한인들 사정은 비슷하였다. 카자흐스탄은 우즈베키스탄과 달리 스탈린이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학교를 폐지하며 한국어 교육을 중지시켰을 때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신문 《레닌기치》를 계속 간행하게 하였고, ‘조선극장’을 유지하게 하였다.
『레닌기치』는 구 소련 영내에서 간행되는 유일한 한글 일간지였다. 국가에서 허용한 신문이기에 『레닌기치』는 정부와 당에서 지시하는 법령과 명령을 게재하고 이것을 설명하는 당기관지의 역할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지면으로 한인들의 작품이 많이 게재되었다. 『레닌기치』는 전성기 때 60여 명의 직원이 있었으며 신문 발행부수도 1만 2000부에 달하였고 타슈켄트, 크질오르다, 두샨베, 프롤제 등지에 지사를 두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레닌기치』는 『고려일보』로 개칭하고 내용면에서도 한인들이 강제 이주당한 이후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수기 등이 게재되는 등 폭로성 기사가 많아졌다. 그러나 한글을 아는 독자가 줄어들어 『고려일보』는 러시아어판을 증가시켰다.
카자흐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Alma-Ata)에 있는 조선극장의 명칭은 ‘카자흐공화국 국립 한인음악·희곡극장(Kazakh Republic National Korean Music and Comedy Theatre)’이다. 이 극장의 기원은 1920년대의 극동지역에서부터 시작된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 이주와 함께 단원을 포함한 전체 한인극장이 크질오르다로 옮겨졌다가 1942년에는 우쉬토베로 이전되었으며, 1959년 다시 크질오르다로 되돌아갔다. 그 후 1969년 한인문화의 중심지인 알마아타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극장에서는 창설 50주년인 1982년에 이르기까지 180편이 넘는 작품을 공연하였는데 그 예술활동 공로가 인정되어 소련정부의 명예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이 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에는 재소한인들이 겪어 온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1938년에 공연된 태장춘의 「행복한 사람들」에서는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뒤의 한인들의 삶이 묘사되어 있었고, 제2차세계대전 기간과 1947년에 공연된 「홍범도」에서는 항일투쟁이 부각되었다.
그 밖에 1920년대 볼셰비키 편에 선 극동한인들의 갈등도 많이 다루어졌는데, 1957년 태장춘과 채용의 「빨치산들」, 1962년 채용의 「새벽」, 1963년 채용과 염사일의 「잊을 수 없는 날들」, 1966년 맹동욱의 「북으로 가는 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근에는 「춘향전」·「심청전」·「양반전」·「흥부와 놀부」 등의 고전이 많이 다루어지기도 한다.
한인극장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단농장이나 농촌을 순회하면서 1년에 25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특히 강제 이주당하여 힘든 생활을 할 때 지방을 순회하면서 마당의 횃불을 조명삼아 공연을 했다. 이때 연출자와 관중이 하나가 되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 한인극장은 한인들의 고통을 달래 주는 유일한 단체였다.
오늘날에도 모든 공연이 한국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각 지역의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알려 주고 민족적 긍지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알마아타에는 1984년부터 한국어방송이 실시되고 있다. 한국어방송은 주 3회, 즉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각각 20분씩 그리고 일요일에는 30분 방송된다. 수요일에는 주로 시사해설을 하고, 금요일에는 보도를, 그리고 일요일에는 문학·예술·음악을 주로 방송한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전소련에서와 같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에 고려인협회와 고려인문화센터가 조직되었고 한글반이 운영되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졌다. 이러한 남한 편중에 제동을 걸기 위해 북한은 ‘아소크’라는 조직을 결성해 북한방문단을 모집하여 북한방문을 알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한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교육원을 설치하였으며, 재벌기업의 진출로 한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였다.
1991년 12월 구소련이 공식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에 5개의 새로운 독립 국가가 탄생하였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독립국가연합이 형성되면서 각 공화국이 국어를 자신들의 민족어로 바꾸고 역사를 새로 서술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종교인 회교를 강조하는 회교민족주의가 차차 강화되어 한인들이 생활하기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2011년 7월 현재 외교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 173,600명, 카자흐스탄 107,130명, 키르기즈스탄 18,230명, 타지키스탄 1,740명, 투르크메니스탄 884명으로 모두 30만 1,584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20세기말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현재 세계적 상호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해외 한인의 존재는 다시금 관심을 받고 있다. 재외동포 사회의 주류 세대층이 이민 1∼2세대에서 2∼3세대로 넘어감에 따라 향후 한국 사회의 재외동포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 및 지속적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중앙아시아 한인은 강제 이주와 불법 탄압, 구소련 몰락, 신생독립국가의 건설 및 적응 등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한 바, 이를 고려한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