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전기, 우상시·상장군·우복야 등을 역임한 무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이에 많은 신하가 항복하기를 의논하였지만, 강감찬(姜邯贊)은 거란군의 예봉을 피하는 것이 급하고 새로운 대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제기하였다. 마침내 국왕에게 남쪽으로 몽진(蒙塵)하기를 권하였다. 그날 밤에 국왕 현종(顯宗)은 후비(后妃), 이부시랑(吏部侍郎) 채충순(蔡忠順) 등의 관료,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개경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지채문이 자청하여 왕을 호종하였다.
국왕 일행이 적성현(積城縣: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렀는데,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을 쏘며 행궁(行宮)을 침범하려고 하였지만, 지채문이 이를 물리쳤다. 창화현(昌化縣: 현, 경기도 양주시)에서는 현리(縣吏)가 난을 일으키자 채충순·주저(周佇) 등과 함께 왕을 피신시켰다.
이듬해 광주(廣州)에서는 길이 어긋난 왕후(王后)를 요탄역(饒呑驛)에서 찾았다. 이어 양성현(陽城縣: 현, 경기도 안성시)을 지나 여양현(礪陽縣: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에 이르렀을 때, 왕에게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에게 중윤(中尹)을 제수하여 민심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지채문의 포상 건의가 지지 기반이 없이 왕위에 오른 현종에게 군인들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전주(全州)의 역참(驛站)인 삼례역(參禮驛)에서는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왕을 전주에 모셔 놓고 호령하자, 여러 무장이 이를 죽이려 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전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왕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나주(羅州)까지 무사히 호종하였다.
거란이 물러난 뒤 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지채문에게 토지 30결(結)을 하사하였다. 1016년(현종 7) 무직(武職)으로서 우상시(右常侍)가 된 이후, 1026년(현종 17) 상장군(上將軍) 우복야(右僕射)를 지내다가 죽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회, 『전라도 천년사 7』 (전북연구원, 2022)
논문
- 신안식, 「현종대 거란의 침략과 전라도」 (『전라도 천년사 7』, 전북연구원, 2022)
- 이미지, 「고려시기 대거란 2차 전쟁 유공자와 그들에 대한 추가 포상」 (『한국사연구』 157, 한국사연구회, 2012)
- 홍영의, 「고려 현종의 나주 남행시 공주 경유의 배경과 의의」 (『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201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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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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