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지씨(鳳州智氏)의 시조이다. 그의 증손이 지녹연(智祿延)이다.
1010년(현종 1) 중낭장(中郎將)이 되어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화주(和州: 현, 함경남도 영흥군)를 중심으로 동북 방면을 방비하다가, 강조(康兆)가 패전하자 서경(西京)을 구원하기 위해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강덕진(剛德鎭: 현, 평안남도 성천군)에 진을 쳤다. 이때 거란인 유경(劉經)이 강조의 패전 때 포로가 되었던 노의(盧敳)를 앞세우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을 권하였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원종석(元宗奭) 등이 이에 응하려 하자 원종석의 항복 문서를 가지고 가는 노의를 죽이고 문서를 빼앗아 불태웠다. 그리고 동북면도순검사(東北面都巡檢使) 탁사정(卓思政)과 합세하여 서경에 들어가 거란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계속되는 거란군의 공격으로 서경이 포위되자 탁사정은 도망가고, 지채문도 개경(開京)으로 빠져나와 서경의 전황을 알렸다.
이에 많은 신하가 항복하기를 의논하였지만, 강감찬(姜邯贊)은 거란군의 예봉을 피하는 것이 급하고 새로운 대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제기하였다. 마침내 국왕에게 남쪽으로 몽진(蒙塵)하기를 권하였다. 그날 밤에 국왕 현종(顯宗)은 후비(后妃), 이부시랑(吏部侍郎) 채충순(蔡忠順) 등의 관료,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개경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지채문이 자청하여 왕을 호종하였다.
국왕 일행이 적성현(積城縣: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렀는데,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을 쏘며 주1을 침범하려고 하였지만, 지채문이 이를 물리쳤다. 창화현(昌化縣: 현, 경기도 양주시)에서는 현리(縣吏)가 난을 일으키자 채충순· 주저(周佇) 등과 함께 왕을 피신시켰다.
이듬해 광주(廣州)에서는 길이 어긋난 왕후(王后)를 요탄역(饒呑驛)에서 찾았다. 이어 양성현(陽城縣: 현, 경기도 안성시)을 지나 여양현(礪陽縣: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에 이르렀을 때, 왕에게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에게 중윤(中尹)을 제수하여 민심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지채문의 포상 건의가 지지 기반이 없이 왕위에 오른 현종에게 군인들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전주(全州)의 역참(驛站)인 삼례역(參禮驛)에서는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왕을 전주에 모셔 놓고 호령하자, 여러 무장이 이를 죽이려 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전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왕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나주(羅州)까지 무사히 호종하였다.
거란이 물러난 뒤 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지채문에게 토지 30결(結)을 하사하였다. 1016년(현종 7) 무직(武職)으로서 우상시(右常侍)가 된 이후, 1026년(현종 17) 상장군(上將軍) 우복야(右僕射)를 지내다가 죽었다.
1031년(덕종 즉위년) 덕종(德宗)이 현종의 남행을 호종한 지채문의 공로가 으뜸이므로 공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장려하라는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