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년(목종 12) 목종이 궁궐의 화재로 상심하여 병이 들어 정사를 보지 못하자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유종(柳宗)·하공진(河拱辰)과 함께 침전의 문 가까이에서 늘 숙직하였다. 왕이 몰래 후사를 논의하던 중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무장한 병력을 거느리고 오자 하공진과 함께 강조의 편에 섰다.
강조(康兆) 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급사중(給事中)이 된 듯하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침입시 동북계도순검사가 되어 서경(西京)에서 중랑장 지채문(智蔡文)과 함께 적군 한기(韓杞)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계속해서 승(僧)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000여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남쪽에서 3,000여 명의 적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법언은 전사하고 적이 대대적으로 서경을 공격해오자 서경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1011년 3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4월에 우간의대부가 되었으나, 8월에 강조의 당파로 몰려 박승(朴昇)·최창(崔昌)·위종정(魏從政)·강은(康隱)과 함께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