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원로(元老). 곽열(郭說)의 아들이다.
처음에 소리(小吏)에서 출발하였다. 선종의 잠저(潛邸) 때에 빈객으로 그 집안일을 맡아보다가 선종이 즉위하자 감찰어사가 된 뒤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이 되었으며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1086년(선종 3)에는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요나라에 방물을 전했다.
선종이 위독하자 시병(侍病)하였는데 숙종이 문병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왕의 병이 더욱 위독하니 왕자는 부르는 명이 없으면 마땅히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하여 들이지 않았다 한다.
숙종이 즉위한 뒤 선왕(先王)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여겨 호부상서를 제수(除授)하였다. 그 뒤 지서경유수(知西京留守)·형부상서·상서우복야 참지정사(尙書右僕射參知政事)가 되었다.
윤관(尹瓘)의 화폐사용 주장에 반대하여 쟁론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103년(숙종 8)에 수사공(守司空)으로 치사하였다. 그는 성격이 소박하고 곧았다. 그리고 다른 재주가 없었지만 평생 재산을 늘리는 일을 하지 않아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다. 1011년 동추밀원사로 상서좌승 허경과 함께 요황제의 즉위를 축하기 위해 요나라에 가서 방물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