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3년(성종 2) 주·부·군·현의 이직(吏職)을 고쳐 병부를 사병(司兵)으로, 창부를 사창(司倉)으로, 당대등(堂大等)을 호장(戶長)으로, 대등을 부호장으로, 낭중(郎中)을 호정(戶正)으로, 원외랑(員外郎)을 부호정으로, 집사를 사(史)로, 병부경(兵部卿)을 병정(兵正)으로, 연상(筵上)을 부병정으로, 유내(維乃)를 병사(兵史)로, 창부경을 창정(倉正)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이직의 개정은 광종 때 호족연합체제가 사실상 무너지고, 성종 때 삼성제(三省制) 도입과 지방관제 실시로 중앙집권체제가 굳어짐으로써 지방세력이 상대적으로 격하된 데 따른 것이다. 이 때의 이직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향리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병부와 창부를 사병과 사창으로 고치고, 낭중과 원외랑을 호정과 부호정 등으로 고친 것은 지금까지 중앙과 같은 관호를 쓰다가 이를 피하여 다른 이름으로 바꾼 것으로, 그들의 지위가 격하된 것을 단적으로 말하여주고 있다.
이로부터 그들은 향리라는 이름으로 향역(鄕役)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집사는 사로 바뀌었는데 이는 집사성(執事省)의 집사에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