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용강 출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연통제연락책.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자 김하원(金河苑)·이기범(李基範) 등과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격문을 초안하여 살포하고, 결사반대 연설을 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그 뒤 5년간 고향을 비롯해 평안북도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제의 침략상을 연설과 격문으로 폭로하여 구국 의식을 고취하였고, 청소년을 상대로 자립 의식을 심어 주었다.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나면서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진로와 방법을 찾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외와의 연락을 위해 연통제를 만들기로 하였다. 1921년 국내 연락 책임을 맡고 비밀리에 귀국, 논밭을 팔아 평양경찰서 정문 건너편 잡화상회를 빌려 ‘자전거상회’라는 위장 간판을 걸고 비밀 연락 장소를 마련하였다.
이후 직접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각종 기밀문서 전달과 제작 배포를 맡는 한편, 군자금이 모집되는 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보내고 국내의 독립투사들에게도 조달하여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지원하였다.
미국 등지에서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동지들과 빈번한 연락을 취하다 일본 형사에게 붙잡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평양·서울형무소를 전전하다 8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1928년 3월 8일 고문 후유증으로 향리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