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채충연(蔡忠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진후(蔡振後)이고, 아버지는 현감 채시상(蔡時祥)이다. 어머니는 권흥익(權興益)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낸 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때 숙종의 명에 따라 오칠언(五七言)·십운율시(十韻律詩)를 지어 후일 나라를 빛낼 인재라는 찬사와 함께 사온(賜醞)의 영예를 입었다.
그 뒤에도 호당(湖堂)에 선임된 자들과 은대(銀臺: 승정원의 다른 이름)에 나아가 시부를 지어 포상을 받았다. 그가 궐내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따라다니며 그가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리도록 할 만큼 시명(詩名)을 날렸다.
1691년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쳐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했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내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대사간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으며, 1730년(영조 6)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해남의 두륜산(頭輪山)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 『희암집』 29권이 있고, 『소대풍요(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