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재의 역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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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851년(철종 2) 황해도 지방민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인 명섭(命燮 또는 明燮)을 추대해 반역을 도모하였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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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51년(철종 2) 황해도 지방민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인 명섭(命燮 또는 明燮)을 추대해 반역을 도모하였던 사건.
내용

이 사건은 1849년(헌종 15) 6월 헌종이 후사 없이 죽은 이후부터 밀계되었던 사건이다.

처음으로 음모를 꾸민 자는 황해도 연안부(延安府)에 거주하던 김응도(金應道)이다. 그는 술수가 능란한 사람으로 같은 해 7월초도(椒島)에 있는 명섭·명혁(明赫) 형제를 방문하였다.

그리고는 나라가 어지럽고 문란한 틈을 타 결당(結黨)을 하고 거사(擧事)를 하겠다는 무리들이 횡행하는데다, 조만간에 청나라 도광제(道光帝)가 죽게 되고 청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태조의 후손이며 소현세자의 후손으로서 멸망하는 청나라를 밀어버리고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태조의 업을 계승하게될 것이라는 내용의 12구(句)의 시를 전하였다.

그 뒤 1850년 6월황해도 해주 문화현에 거주하던 채희재 역시 초도에 있는 명섭 형제를 방문하고 추대의 뜻을 전하자, 명섭은 김응도의 말을 전하게 되었다.

그 뒤 김응도와 채희재는 서로 만나 밀의 한 뒤 명섭을 모주(謀主)로, 김응도와 채희재를 모사(謀士)로, 그밖에 문화현의 유흥렴(柳興廉)·재령군(載寧郡)의 기동흡(奇東洽) 등을 심복으로 하였다.

또 구월산성(九月山城)의 별장 최치각(崔致珏) 외 고성욱(高成旭)·유희균(柳喜均)·유녹균(柳祿均)·기동인(奇東仁) 등 수십 명을 모아 결당하고 국태민안의 기치 아래 거사하기로 하였다.

삼로(三路)로 나누어 첫째 길은 안악(安岳)으로 들어가고, 둘째 길은 해주 감영에 들어가 병부(兵符)를 빼앗고 성을 점거하며, 셋째 길은 문화현으로 들어가 병부를 빼앗은 뒤 평양에 모여 서울로 쳐들어가기로 작정하고, 1851년 11월 7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무리 중 고성욱이 사전에 고발함으로써 주모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었다. 명섭은 병으로 인해 서울로 오는 도중에 죽었으며, 채희재·김응도·기동흡은 10월 26일 능지처사되었고, 최치각은 참수되었다.

한편, 명섭의 동생 명혁은 이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해 11월 11일함경도 단천부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문화현은 현령에서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은 1853년에도 당시의 잔당이 남아서 거사를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그 해 10월김수정(金守楨)·최봉주(崔鳳周)·홍영근(洪榮瑾) 등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철종조 삼남 일대를 휩쓸었던 민란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며 북쪽 지방에서 일어난 모반 사건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철종실록』
『승정원일기』
『좌우포청등록』
『추안급국안』
『일성록』
집필자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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