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의 여파가 간도에 미쳐 3월 12일부터 독립시위가 시작되고 명동학교생 등 많은 희생자가 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사립명동학교 · 사립정동학교생과 기타 사립학교생 및 노령에서 온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단장은 연길현 국자가 소영자(延吉縣局子街小營子) 한인사립학교 교사 김상호(金尙鎬)였다. 과격한 방법으로써 일제에 대항하는 급진적 청소년단체로 일본인들을 전율하게 하였다. 1919년 4월 3일의 용정(龍井) 일본영사관 관사의 화재와 4일 이 영사관의 일부 화재는 이들의 방화에 의한 것이었다.
김상호는 4월 27일 명동학교생 15명, 정동학교생 10명, 국자가 중국도립학교 생도 3명, 화전사명당모(樺田社明堂帽) 배영학교(培英學校) 생도 2명으로 암살대를 조직, 권총과 폭열탄을 갖고 일본인과 한인밀정 및 순사를 암살하기로 하였다.
5월 4일에는 간도총영사관 근무 한인 경부(警部)와 순사 20명에 대하여 사직하지 않으면 최후수단을 쓰겠다는 경고장을 발송하였다. 그 결과 6일에 3명이 사표를 제출하였고, 계속 사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1월에는 간도 용정촌 한인들에 대하여 11월 25일이 단군건국기념일이므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일반업무를 휴업, 경축의 뜻을 표하라는 경고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