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사적 제61호. 발해는 국토의 중요지역에 상경(上京)·중경(中京)·동경(東京)·서경(西京)·남경(南京)의 5경을 두었는데, 처음에는 서울을 중경에 두었다가 상경과 동경을 거쳐 다시 상경으로 옮겨갔다 한다.
발해 5경의 도성은 방형 또는 장방형의 토성이나 토석성(土石城)으로 축성하고, 성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교차되는 대로를 설정하는 것이 특징이며, 특히 남북의 대로인 주작로(朱雀路)는 너비가 동서대로보다 넓었다 한다.
현재까지의 학설에 따르면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의 도성 위치에 대하여서는 함흥이라는 설도 있으나, 북한에서 이 토성을 발굴하고 주장하는 바로는 함경남도 북청의 동남방 16㎞의 남대천(南大川) 북안 평지에 있는 청해토성이 남해부라는 것이다.
이 토성은 남북 길이가 340m, 동서 길이가 500m, 둘레는 약 1,289m에 이르는데,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세워진 중요한 전초기지의 성으로, 성벽은 현재 남벽·서벽·북벽만이 남아 있으나 성벽의 크기나 축성법은 상경의 토성과 비슷하다.
성문 앞에는 서울 동대문의 것과 같은 반달형의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이 있고, 성안은 직각교차로에 의하여 구획되었으며, 온돌시설을 갖춘 집자리 4개와 8각석축으로 된 우물이 발견된 바 있다.
발해가 일본과 교류할 때인 776년(문왕 40)에 단 한번 남경을 거쳐 토호포(吐號浦 : 新昌)에서 배가 떴다고 하는데 이때 풍랑을 만나 167명 중 120명이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