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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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으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인. 영화배우 · 감독.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8년
사망 연도
1999년
출생지
경기도 파주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으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인. 영화배우 · 감독.
내용

경기도 파주 출생. 1945년 개성공립상업고등학교를 나와 1952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때 제1회 전국대학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한 번역극 「비오는 산골」(1948)과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주연을 맡아 주목을 받으며 극단 신협(新協)에 입단했다. 그를 계기로 1954년 이만흥 감독의 「탁류」에 발탁되면서 영화배우가 되었다.

이후 「주검의 상자」(1955) · 「젊은 그들」(1955) · 「유전의 애수」(1956) · 「잃어버린 청춘」(1957) 등을 통해 주연급 배우로 올라서는 여세를 몰아 「마도의 향불」(1958) · 「가는 봄 오는 봄」 · 「장마루촌의 이발사」 · 「꿈은 사라지고」(1959) · 「길은 멀어도」 · 「이별의 종착역」(1960) · 「에밀레종」 · 「지상의 비극」 · 「오발탄」 · 「5인의 해병」(1961) · 「원효대사」 · 「외나무 다리」(1962) · 「대지의 성좌」 · 「혈맥」 ·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 「빨간 마후라」 · 「검은 상처의 부르스」(1964) · 「남과 북」(1965) · 「잃은 자와 찾은 자」(1966) · 「기적(汽笛)」(1967) · 「재혼」(1968) · 「주차장」(1969) · 「아빠와 함께 춤을」 ·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 · 「30년만의 대결」(1971) · 「자유부인2」(1986) 등 800여편에 출연하였다. 주연작만 230여편을 헤아린다.

그는 일찍이 제작에도 손을 대어 「유전의 애수」 · 「잃어버린 청춘」을 내놓았고 1966년에는 영화감독으로 전향하여 「피어린 구월산」을 비롯하여 「나운규의 일생」 · 「한 많은 석이 엄마」(1966) · 「서울은 만원이다」 · 「연화(戀火)」(1967) · 「정두고 가지마」 · 「제3지대」(1968) · 「상처」 · 「흑점」(1969) · 「이 한 몸 돌이 되어」(1983) 등 16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그의 연기는 신극이 중시하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맑은 음성과 눈에 의한 감정 표현이 특징이었다. 최무룡 연기의 정점은 억울하게 강도 혐의로 몰리게 된 한 전기공의 극한 상황을 정확한 해석으로 이끌어낸 「잃어버린 청춘」(1957)의 위진국 역이다.

그는 1961년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지상의 비극)을 수상한데 이어 「빨간 마후라」(1964)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남과 북」(1965)과 「30년만의 대결」(1971)로 두 차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으로는 대종상 남우조연상(1971)을 받았다.

영화계 원로로서 각종 영화단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국영화인협회 부위원장 및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93~94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1995년 우리영상사업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천거로 1988년 13대 총선 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1999년 11월 11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영화배우 최민수가 그와 강효실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참고문헌

『한국영화감독사전』(김종원 외, 국학자료원, 2004)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www.kmdb.or.kr)
집필자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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