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우(崔成宇)는 189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도금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련 공민고등학교 7학년 과정을 수료하고,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특별상급교육기관 붉은교수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20년 러시아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1919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장도정(張道政) · 전일(全一) 등과 함께 사회주의 비밀결사 일세당(一世黨)을 조직하고, 기관지 『일세보(一世報)』를 발행하였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중앙총회에서 선전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4월 ‘연해주참변( 사월참변)’을 피해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로 이주한 후 러시아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지역 신문인 『붉은 별(赤星)』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아무르 빨치산 부대에서 정치 사업을 전개하였다. 1923년 8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국치일을 맞아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시베리아 내전 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코민테른 동양부 내 조선 문제 담당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2월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탄압 사건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수배되었으나, 소재 불명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서기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던 중, 1937년 8월 26일 코민테른에서 반소비에트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소련에 맞서 첩보 사업을 전개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28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고, 당일 형이 집행되었다. 1957년 4월 4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판결로 복권되었다.
1934년에서 1935년까지 코민테른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에 대하여」, 「종파와의 투쟁 임무에 관한 조선공산당 발기자 그룹의 서한에 대하여」 등을 기고하였다. 그의 글은 조동규의 번역으로 1935년 모스크바의 외국노동자출판부에서 『조선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영도권 문제』로 출판되었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