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해인사 대적광전에 있었던 불상으로 현재는 새로 지은 대비로전에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특히 법보전 불상과는 크기나 착의법, 표현양식이 거의 동일한데 다만 나무 속을 파내는 제작기법과 과학적 분석 결과 등에서 차이가 있어 제작시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로는 62건 266점에 달하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후령통과 고려와 조선시대의 복식류, 전적, 다라니 등 중요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발원문과 후령통에서 1490년에 쓰여진 해인사기가 발견되어 1490년에 행해진 불상의 보수 등 중요 내용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재료는 향나무이며 여러 개의 나무를 접한 접목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차분하면서도 근엄한 표정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릎에서 균형 잡힌 신체 비례를 보인다. 수인은 두 손을 가슴 부근에 들어 치켜 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 쥔 지권인을 취하였다. 양감 있는 신체에 편단우견의 대의를 입었으며 옷주름은 입체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데 특히 옷자락이 두 무릎 사이로 속도감있게 흘러 내려 무릎 아래로 자연스럽게 펼쳐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무의 속을 파내는 기법과 과학적 분석에서 법보전 불상과 차이를 보여 법보전의 상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1167년을 하한으로 볼 수 있는 발원문이 복장에서 발견되어 이 불상이 늦어도 고려 1167년 이전에 제작된 상임은 분명하다.
복장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된 복장물 중 최대·최고의 수준으로 총 62건 266점이 발견되었다. 다량의 전적물과 함께 1490년 승 학조(學祖)가 지은 중수발원문이 포함되었는데 1488년에서 1490년 사이에 이루어진 해인사 중창불사 내용과 함께 대적광전의 주불을 보수한다는 내용, 그리고 삼존불로 모셔진 사실 등을 밝혔다. 1167년 이 지역 유력 세력이었던 사씨(史氏)와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중수, 고려 14세기 후반에 화살 명장(名匠) 송부개(宋夫介)의 중수 참여, 그리고 1490년 조선 왕실 주도로 이루어진 개금중수 사실만으로도 한국조각사에서 중요한 불상이다.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요선철릭(腰線帖裏, 허리에 선장식이 있는 철릭), 답호(褡穫), 저고리, 사경낭(寫經囊), 주머니, 직물 편 등 12점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은 1490년에 납입된 것으로 저고리를 비롯하여 오색후혈장엄(五色喉穴藏嚴) 등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같은 사찰의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더불어 현재 해인사 대비로전에 함께 봉안되어 있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영주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자인당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과 수인, 대의, 옷주름의 표현 등이 비교된다.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의 수인에 편단우견의 대의를 입었으며 균형 잡힌 신체 비례에 양감이 강조된 얼굴과 신체, 생동감있는 옷주름 등에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양식적으로 9세기의 특징이 잘 남아 있는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납입된 복장유물 역시 양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우수성에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고려시대의 요선철릭이나 답호 그리고 1490년에 납입된 홑저고리는 조선 초기의 저고리 유형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