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 · 미술과장 · 수석학예연구관 ·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직하여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마쳤다.
6 · 25사변 중에는 생명을 내걸고 소장 문화유산을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였다. 1950년대 초반 서울 환도 등 혼란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세 번이나 이전, 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순직하였다.
1962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 · 목기 · 회화 전시를 비롯하여 ‘한국미술2천년 전시’ 등 대소 규모의 특별 전시를 수십 차례나 주관하여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 ·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국외에서도 1950년∼1961년 사이 한국 미술의 미국 · 유럽 전시와 1976년∼1984년 사이 ‘한국미술5천년’의 일본 · 미국 · 유럽 전시의 주역으로 한국 미술 문화를 세계에 크게 선양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 홍익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한국 · 동양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
1945년부터 5년간 문학 동인지 『순수(純粹)』의 주간도 맡은 바 있는 그는 한국 미술에 대한 주옥같은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의 감식안은 당대 제일로 고미술계가 혼란한 중에서도 옥석을 가리고 자신 있게 정론을 폈다. 그의 지론은 한국 미술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우며 미술품에 잔재주를 부리면 한국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 위원(1967년∼1984년), 한국미술평론인회 대표(1962년∼19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1965년∼1966년),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1976년∼1980년)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미술 연구와 문화유산 보존에 깊고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에게는 방대한 저서 · 논문보다는 국민을 폭넓게 이해시키기 위한 수많은 수필 · 논고가 있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최순우전집』(전 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가 있다.
1960년 녹조소성훈장(綠條素星勳章), 1977년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을 받고, 1984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