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 최윤(崔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자점(崔自霑)이고,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최세건(崔世楗)이다. 어머니는 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를 거쳐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저작에 올랐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설서·사서를 거쳐 1531년(중종 26)에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고변하고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이어 정언·지제교를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었을 때, 대간으로부터 여러 차례 탐관이라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깊어 유임되었다. 1537년(중종 32) 장령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장이 능하다고 하여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 해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자 충청도어사가 되어 농민을 위무하였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부제학·대사간·동부승지·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1545년(명종 즉위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 소윤에 가담,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으며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어 도승지로 경연참찬관을 겸임했고, 1546년(명종 1) 이조참판에 보임되었다. 한성부좌윤을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했는데, 그 동안 승문원 소속의 노비 2구를 점탈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승진했고, 곧 한성부판윤으로 전임되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였다.
1548년(명종 3) 지중추부사·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를 거쳐,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평양에서 병사하였다. 시문에 능해 국가에서 주관하는 교서·책문을 주로 담당했고, 어제시(御製詩)에 항상 수석 또는 차석을 차지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저서로 『간재집(艮齋集)』이 있다. 좌찬성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