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신앙에서는 ‘최영 장군신’을 ‘최일 장군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영은 고려의 명장으로서 이성계(李成桂)에게 패하고 억울하게 죽어서 원혼이 되었기 때문에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된 듯하다.
최영은 생전에 청렴결백하여 결코 남의 재물을 탐내는 일이 없었다는 많은 일화를 가진 역사적 인물로서, 그가 죽은 원한이 컸기 때문에 그가 죽은 경기도 고양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의 무속에서는 그를 산신으로 모시게 된 것 같다. 특히, 개성의 덕물산(德物山)에는 장군당이라는 최영 장군을 모신 신당이 있었으며, 그것을 속칭 최영사(崔瑩祠)라 하였다.
최영사 안에는 최영 장군의 무신도를 비롯한 여러 무신도들이 걸려 있고, 산하의 마을에서는 3년마다 최영사에서 도당굿을 하였다. 그러나 이 굿이 최영 장군을 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최영 장군신은 오히려 부수적으로 모셔지는 신에 불과하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와 홍명희(洪命喜)의 소설 「임꺽정전」에 “처녀를 바쳐서 신령과 결혼시킨다.”는 전설은 전하여지고 있으나 실제 굿으로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중부지방에는 고려시대의 무속신앙이 강하게 전하여오던 지역으로 최영사에 모셔진 최영 장군신을 산신으로 모시게 되고, 또 그것이 인근 지역으로 분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조선왕조 말엽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무당내력도(巫黨來歷圖)』의 ‘감응청배(感應請陪: 흔히 무당들이 가망거리라 함.)’라는 거리의 설명에는 다음과 같이 주서되어 있다.
“굿을 할 때 무당이 태백산을 바라보고 ‘성령감응’이라고 세번 부른다. 요즈음에는 풍덕군 덕물산을 향하여 ‘최장군청배’라고 부르짖으니 잘못도 심하다 하겠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말에는 이미 무속에서 최영 장군신을 모시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과 경기북부지역 무속의 상산거리 중의 공수에 보면 “나라 충신에 임장군님, 덕물산에 최일 장군 아니시랴. 지주 한라산에 여장군님 아니시리……” 등으로 여러 장군을 호명하는데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무당이 신당에 모시는 무신도에 보면, 손에 삼지창이나 월도를 든 모습, 말을 탄 모습, 또는 부부신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위력이 있는 장군신의 모습인 것은 같다. 최영 장군신의 등장은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고자 한 원혼신앙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