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원 ()

목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진(伯進)
추봉(秋峰), 화암(花巖)
시호
충간(忠簡)
이칭
해천군(海川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1년(명종 16)
사망 연도
1614년(광해군 6)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대사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진(伯進). 호는 추봉(秋峰) 또는 화암(花巖). 최경(崔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여주(崔汝舟)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최황(崔滉)이며, 어머니는 허초(許礎)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1년 음보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이 해 5월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이 된 뒤 형조좌랑 · 아산현감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1602년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에 올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청현직(淸顯職)에 올라 지평, 사서 · 장령 · 정언 · 헌납, 홍문관의 부교리 ·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사간이 되어 사대부의 사치풍조를 금할 것과 임진왜란 이후 퇴폐해진 학문을 진작시켜야 한다고 진언하였고, 다음해 집의가 되어서는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비리를 논박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대사간, 형조 · 이조의 참의, 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해천군(海川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위향(李偉卿) · 정조(鄭造) 등이 폐모론을 주창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는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사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행으로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이태진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