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진(伯進). 호는 추봉(秋峰) 또는 화암(花巖). 최경(崔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여주(崔汝舟)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최황(崔滉)이며, 어머니는 허초(許礎)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1년 음보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이 해 5월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이 된 뒤 형조좌랑 · 아산현감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1602년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에 올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청현직(淸顯職)에 올라 지평, 사서 · 장령 · 정언 · 헌납, 홍문관의 부교리 ·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사간이 되어 사대부의 사치풍조를 금할 것과 임진왜란 이후 퇴폐해진 학문을 진작시켜야 한다고 진언하였고, 다음해 집의가 되어서는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비리를 논박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대사간, 형조 · 이조의 참의, 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해천군(海川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위향(李偉卿) · 정조(鄭造) 등이 폐모론을 주창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는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사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행으로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