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원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백진(伯進)
  • 추봉(秋峰), 화암(花巖)
  • 시호충간(忠簡)
  • 이칭해천군(海川君)
인물/전통 인물
  • 본관해주(海州)
  • 사망 연도1614년(광해군 6)
  • 성별남성
  • 주요 관직대사헌
  • 출생 연도1561년(명종 16)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태진 (서울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4년 0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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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진(伯進). 호는 추봉(秋峰) 또는 화암(花巖). 최경(崔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여주(崔汝舟)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최황(崔滉)이며, 어머니는 허초(許礎)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1년 음보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이 해 5월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이 된 뒤 형조좌랑 · 아산현감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1602년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에 올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청현직(淸顯職)에 올라 지평, 사서 · 장령 · 정언 · 헌납, 홍문관의 부교리 ·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사간이 되어 사대부의 사치풍조를 금할 것과 임진왜란 이후 퇴폐해진 학문을 진작시켜야 한다고 진언하였고, 다음해 집의가 되어서는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비리를 논박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대사간, 형조 · 이조의 참의, 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해천군(海川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위향(李偉卿) · 정조(鄭造) 등이 폐모론을 주창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는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사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행으로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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